로빈 킨로스, 『현대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짧은 단상들
글 권지운
1.
누군가의 의견이 담긴 글을 읽을 때 화자의 의도를 정확히 하기 위하여 범주를 좁히는 표현들 —
‘~ (이)지만 ~만을 다루도록 하겠다.’ 라던지 ‘~중 ~를 의미한다.’ 등 — 을 만날 때 나는 그 행간에서 무언의 압박을 느낀다. ‘이렇게 읽지 않으면 틀린 거야’, ‘오차 없이 이렇게만 읽어줘’. 하는 독자의 오독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글쓴이의 바람이 전달되서일까. 물론 글의 종류나 글이 쓰인 매체에 따라 필요한 불필요한 오해를 최소화해야 하는 정도가 다르고, 화자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야 내용에 대한 분석의 정확도가 높아지며 더욱 첨예한 논의가 가능해진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비언어적 표현이 결합한 대면 대화에서도 상대방의 생각을 100%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하물며 글에서 그런 오차 없는 독해가 가능할까? 독자의 메타적인 분석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가? 하며 딴지를 걸고 싶다.
이에 대해 정확성을 중요시하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는 정합성을 위한 표현들이 자신의 의견과 일치했을 때 쾌감을 느낀다고 이야기하며 엄밀하지 않은 글은 “뭐라는 거야? 이 정도 나이브한 생각은 나도 한다”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 대화 후에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글이나 작업이나 하여간 뭐에서든지 자율성을 가지고 해석해볼 소스가 많은 것에 더 흥미를 느낀다는 사실과 동시에 어쩌면 정합성을 두려워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이 두려워서 더 첨예해지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허들이 낮은 글, 쉽게 읽히는 글 (그러나 수용자의 경험이나 배경지식에 따라 해석의 범위가 다양해지는 혹은 달라지는)을 이상적으로 생각해왔는데, 어쩌면 그것이 내가 글을 쓸 때 좀 더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타이포그래픽 디자인>은 통제와 규칙으로 가득한 실습 교본이었다. 실습 교본을 읽고 그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 감상을 남기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이 책 안의 것 보다 이 책 바깥의 것들 (이를테면 책이 나오게 된 시대적 배경이나 맥락,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저자의 의견 변화와 같은 것들) 에 오히려 흥미를 느꼈다. 어쨌든 이 책에서 그는 ‘정확한’, ‘잘’, ‘~말아야 한다’, ’~하지 않는다’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타이포그래피의 규칙에 대해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일상적인 소량 인쇄물 작업파트에서 얀 치홀트는 “타이포그래피는 주어진 글을 읽기 좋게 정리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리란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타이포그래피를 위해서는 먼저 인쇄를 위해 주어진 글을 끝까지 읽고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글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라는 부분을 통해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타이포그래피의 본질적인 역할에 대해 강조한다.
순수미술을 해왔던 나는 이 책을 통해 타이포그래피를 처음 제대로 알게 되었는데(단 하나 수강한 학부 부전공 타이포그래피 수업에서 유일하게 읽게 된 책은 원서였어서 읽었다는 자각이 없다.), 이를 통해 타이포그래피가 굉장히 정치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한 독해를 설정하여 문자의 위계를 정하고 화면을 구성하는 일은 결국 수용자의 읽기를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타이포그래피는 이미 의미를 가진 문자를 다루고 있음으로 순수미술에 비해 정보를 전달하는 데 있어, 수용자를 통제하여 그 전달력을 높이고자 한다.
3.
이 책에서 얀 치홀트가 칭하는 예술은 타이포그래피 디자인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를테면 “이해하기 쉽게 분명하고, 기술적으로도 흠 없이 깨끗한 타이포그래피만이 예술 작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모든 종류의 능력은 예술로서 가치가 있는데, 여기서 말한 예술이란 이런 맥락의 예술이다)” 와 같은 문장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굳이 예술이라고 일컫지 않아도 되는 부분도 예술로 승격시킨다는 인상을 받았다. 왜 이상적 타이포그래피가 예술 작품이 되어야 하는지 동의하기 어렵다. 예술 작품이나 문자를 통해 내용을 전달하는 일 사이에 절대적 우열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모두 어떤 경지에 도달한 아름답고 숭고한 것인가?
4.
얀 치홀트가 자신의 규칙들을 망라하여 이론을 정립하고 나아가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 매우 거대하게 느껴진다. 그는 나에게 타이포그래피란 무엇인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이전에 나는 그것들을 어떻게 대할 것 인가에 대한 고민을 안겨주었다. 수용자에게 내 언어를 그대로 전달하는 타이포그래피 작업과 수용자의 개입을 최대화하는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교차하여 해보면서 창작자의 관점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실험해보고 싶다.
운동(movement)이 되지 못한 운동:
(르 코르뷔지에, 『건축을 향하여』, 이관석 역, 동녘, 2007)에 담긴 사회변혁 의지
글 권지운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 뿐인데 …’ 도시의 콘크리트 아파트에 사는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유명한 노래의 가사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이 가사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어른이 된 나는 저 가사를 곱씹을 때마다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끼며 네모난 콘크리트 건물의 네모난 침대에 누워 다른 형식의 집에 대한 낭만을 품는다.
건축 프로그램을 보며 한국의 전형적 거주 형태인 아파트를 탈피하여 자기만의 집을 지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1인 가구라는 가구 형태와 비용적 측면, 한국에서 아파트가 가지는 자산 투자의 개념을 고려할 때 다른 형식의 집에 산다는 것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상’처럼 느껴진다. 동시에 도대체 아파트라는 개념은 언제부터 등장하게 된 것인지, 도시 계획과 발전 과정에서 고효율의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닭장 같은 원룸과 아파트의 등장은 필수적이었을지 하는 푸념 섞인 질문에 봉착하고 만다.
『건축을 향하여』는 현재의 도시 풍경에 근간이 되는 대량 생산 주택과 건축의 다섯 가지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나의 궁금증을 일정 부분 해소해주었다. 책의 저자인 르 코르뷔지에는 화가 오장팡, 시인 폴 데르메와 함께 창간한 잡지 『에스프리 누보』의 논평을 엮어 『건축을 향하여』를 만들었다. 이 책에서 그는 에꼴 데 보자르 등 당대의 아카데미즘 건축을 비판하고, 세계 대전 이후 변화가 필요했던 건축에 대해 근대 산업문명을 열렬히 환호하며 모더니즘 이념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시대에 알맞은 건축으로서 선박, 항공기, 자동차와 같은 기계화된 수송 수단을 찬양하고, 본질을 중시하는 엔지니어 미학의 조화와 건축물의 질서를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그의 이념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준을 토대로
대량 생산 주택이라는 개념을 주창하여 주거 환경의 표준 설정을 제시한다. 노동자에게 동등하게 안정된 주택을 제공함으로써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건축을 향하여’라는 제목처럼 독자는 이 책에서 건축에 대한 그의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아파트라는 개념의 기틀이 되는 그의 이론은 현대 건축과 도시 계획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본론에서는 그의 유토피아적 사고의 줄기를 따라가 보며 건축이라는 그의 창작 행위가 결국 어떠한 변혁의 열매를 맺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문장인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저자의 발화 의도와 일치하든 불일치하든 간에 20세기 서양 건축과 도시계획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기존의 주거 개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재정의한다. 이는 표준화된 기계문명에 대한 그의 이상적 견해 때문일 것이다. 그는 “완벽성의 문제에 맞서기 위해 표준을 설정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표준의 설정이 야기하는 경쟁이 결국 진보를 낳게 된다고 믿었다.
생산 과정을 규격화하여 건설의 부품을 완성한다면 짧은 시간 안에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주택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지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를 통해 모든 이에게 자기 소유의 안전하고 영구적인 집을 제공하고자 했다. 예시로 등장하는 ‘도미노 주택’은 2층 구조를 이루는 3개의 슬래브와 계단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가진 건축물로써, 유닛을 도미노처럼 직렬로 정렬하면 다양한 패턴의 연립주택을 만들 수 있는 건축물을 일컫는다. 저자는 이 건축물이 “모든 사람에게 유용하고 건강한, ‘주택-도구’의 결론에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술가들의 감수성이 엄격하고 순수한 유기체들에 부여할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고 표현한다.” 이는 1935년까지 르코르뷔지에가 작업한 대부분의 주택작업에 구조적 토대가 되었다. 이후 등장하는 다양한 대량 생산주택과 ‘빌라형 공동주택’의 도면, 탑상형 도시구조는 오늘날의 원룸 및 아파트 단지와 대도시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하다. 약 100년 전에 대량 생산을 활용한 주택을 상상하고 위로 쌓아올려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도시를 계획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또한 그는 건축의 새로운 다섯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필로티, 옥상 정원, 가로로 긴 창, 자유로운 평면과 파사드가 그것이다. 필로티는 지면에서 매스를 떨어뜨려 올리는 구조로써 땅을 건물로부터 해방할 수 있다. 이는 건축면적을 증가시키고, 건축물을 기둥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생겨난 공간을 다양한 용도로 쓰일 수 있게 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순환이 되지 않는 건물 사이의 중정은 위로 올려 대로를 따라 서 있는 나무들이 아닌 푸른 초원과 놀이공간, 조림지가 내다보이는 아파트를 만든다. 저자는 “이렇게 지붕을 없애고 테라스로 대체함으로써 철근 콘크리트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평면의 새로운 미학으로 우리를 이끌었다.”며, 수직면에 적용된 새로운 평면은 자유로운 파사드를 만들고, “진화의 열쇠는 평면”이라고 주장했다. ‘빌라 사부아’는 이념적으로 제시된 이 5원칙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건축물이다.
한편 저자가 주장하는 기계의 도입에 따른 미의식의 전환은 어떤 장식도 불필요하며,
단지 목표하는 바를 위한 명쾌한 기능과 생성 과정에 충실한 사물의 본질로의 회귀를 강조한다. 이는 과거 역사를 풍미하던 종교적, 정치적 암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현재의 문제 제기와 의문에 대한 해답은 이성에 근거한 과학적 본질을 통해 제시됨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건축이냐 혁명이냐”라는 건축과 혁명 사이에서 제기된 물음은 사실상 하나의 답변으로 귀결될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깨어져 버린 사회적 안정을 해결할 열쇠는 건축물의 문제에 있다"라는 문장에 첨부된 질문으로서, 전통적 사회관계와 체제 및 제도적 질서가 ‘모더니즘'으로 대변되는 기계적 현대성으로 대체되는 과정에 대한 일종의 응답이었다.
특히 이는 전쟁 이후 근대 유럽의 낡은 질서가 파괴적인 충격과 충돌할 위험에 맞서, 어떻게 하면 사회를 급격한 단절 없이 연착륙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 반혁명의 기획이기도 했다. 따라서 책의 말미를 “건축이냐 혁명이냐. 혁명은 피할 수 있다”로 끝마친 것은 반혁명으로서의 현대 건축적 기획에 제법 합당한 마무리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대량 생산 주택이라는 개념이 실현되었음에도 체제 안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소유의 안전하고 영구적인 집을 얻지 못하고, “주택 소유의 꿈이 실현 불가능할 때, 사람들은 감정적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한다.”는 그의 말처럼 만연한 대도시의 무기력과 번아웃을 굴레를 피할 도리가 없다. 사회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체제 안에서 사회지도층의 주도하에 위로 쌓아 올려 도심의 밀도를 증가시키는 수직적 건축구조가 과연 임차인과 임대인의 관계를 개선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주거 환경을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물론 저자는 파르테논이나 아크로 폴리스 등 과거의 정신을 이야기하며, 과거를 무조건적으로 부정하기보다 근대 기계문명을 성공적으로 도입하여 진보로 나아가자는 입장을 명확히 한다. 또한 1차 대전 이후 유럽의 노동자 계층의 주택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주택을 재정의하고, 자신의 창작물인 건축과 도시 계획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새로운 관점과 담론을 제시하여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모더니즘 이념을 부상시킨 것은 자명한 의의가 있다. 이 책의 역자는 『건축을 향하여』를 두고 “역사의식에 기초하여 현상에 대해 올바른 진단을 내리고 당연시되던 기존 문화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진취적 기상과 새로운 건축을 향한 혜안은 20세기 건축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음미하고 가슴에 새겨야 할 생명력으로 느껴진다”고 평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시대적 변화에 대응할 새로운 지향점을 찾아내는 예술적 정신을 추구했다. 그의 건축과 도시 계획안은 현대에 이르러 대도시의 과밀화나 빈부격차에 의한 슬럼화의 문제점을 야기하는 등 많은 부작용을 낳았지만, 그의 개념이 현대 건축과 도시계획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는 대량 생산된 요소들로 지어진 주택이 “임차인과 임대인의 관계를 변형시키고, 주거의 개념을 수정하며, 도시를 정돈할 것이다. 주택은 부를 자랑하는 호사스러운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며, (…) 하나의 도구가 될 것”을 상상했으나 현재 주택은 정확히 반대의 의미로 퇴색되었다.
어쩌면 그가 상상한 유토피아적 건축 개혁은 체제 변화 없이는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없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체제 안에서 그의 개념들은 사회지도층에게 너무나 매력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주택의 표준화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자 건설사와 개발업자들은 그가 중시했던 옥상 정원이나 놀이 공간 등은 무시하고 도시의 문제점을 가속화하는 건축물을 지어댔다. 도시는 점점 더 삭막해지고 무분별하게 확장되었다.
건축(창작)을 통한 변혁은 혁명의 기폭제가 될 수 있겠으나 근본적인 시스템의 변화 없이 개혁을 이끌겠다는 바람은 새 시대를 맞이한다는 희망이 깃든 시기에만 유효했던 꿈처럼 느껴진다. 체제에 대한 과거의 청산과 현재의 진단 그리고 미래의 설계가 동시에 진행되지 않는 한 사회는 쉽사리 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대도시의 문제점들을 대도시의 내부에서 해결하고자 했던 그의 이상 도시 계획은 처음부터 ‘이상’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4평 남짓한 서울의 청년 주택, 수직으로 쌓아 올리다 못해 등장한 반지하 방, 그가 끔찍이도 싫어했던 수많은 1층의 카페와 그 카페 안의 집 내부에 공부할 공간이 여의찮은 청년들이 자리를 깔고 공부하는 모습 등 지나치게 과밀화된 작금의 서울을 보고 사회와 일터를 위해 가정의 안정을 꿈꾸며 도시의 낭비를 거부한 그가 어떤 새로운 변혁의 발상을 제시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참고자료
이건섭,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 인간을 위한 혁명과 인간이 배제된 혁명」, 『월간 컨셉』, 제60호, 2004,136-141쪽.